인간의 정체성은 결정적 시기에 맺은 관계에 달려있다
한국은 반려동물 천만 시대를 살고 있다. 어디를 가나 반려동물을 데리고 다니는 사람들의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정이 들면 가족이나 다름이 없어서 잃어버리거나 떠나보낼 때는 큰 슬픔과 아픔을 겪게 된다. 필자도 푸들을 잠시 맡아 키운 적이 있었다. 필자가 의도한 지시를 한두 번에 알아듣고 따라하는 것을 보고, 사람 같다는 생각을 여러 번 했다. 태어난 직후부터 사람이 키우고 훈련시킨 동물 중에는 자연 상태에서 태어난 동물보다 인지적으로 뛰어난 능력을 보여는 경우도 많이 있다.
그런데, 반려동물을 포함해서 동물과 사람 사이에는 한 가지 분명한 차이점이 있다. 동물은 어떤 환경에서 어떤 특별한 훈련을 받는다고 해도 결코 사람처럼 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아무리 천재적인 인지 능력을 가진 동물이라고 해도 사람처럼 생각하고 말을 하는 경우는 없다.
사람은 어떨까? 사람도 성장이나 양육 환경에 상관없이 결국 사람으로 성장할까? 이 질문에 대답을 얻을 만한 일이 벌어진 적이 있다.
1799년 프랑스 아베롱(Aveyron)에서 늑대처럼 숲속을 뛰어다니던 인간을 닮은 생명체가 포획되었다. 그가 바로 <늑대 소년>이란 영화의 소재가 되기도 했던 아베롱의 야생아 빅토르였다. 11세가 되어서 인간 사회로 돌아온 빅토르는 야생에서 인간과의 접촉이 전혀 없이 자랐다. 의사였던 장 이따르(Jean Marc-Gaspard Itard)는 그에게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리고 환경 때문에 인간성을 상실했다고 보고, 생활환경을 보통 상태로 돌려 적당한 훈련과 교육을 하면 인간성을 되돌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장 이따르를 비롯한 사람들은 늑대처럼 맨몸으로 바닥에서 자고, 씻을 줄도 모르고, 썩은 음식을 먹던 빅토르를 인간의 삶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애를 썼다. 언어를 사용하고, 인간으로서의 감각과 정신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었지만, 빅토르는 끝내 인간의 언어를 익히지 못한 채 40세로 생을 마감했다.
빅토르와 유사한 몇몇 사례를 두고 발달심리학에서는 인간의 발달 과정에서 ‘결정적인 시기’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대개 아이가 태어난 후부터 3~4세까지를 일컫는 이 시기를 동물과 함께 보낸 아이는 자신을 동물로 여기는 정체성을 가졌다. 이런 아이는 사람의 언어를 배울 수 없었고, 기본적인 눈 마주침이나 인사도 어려웠다.
동물은 어느 시기에 어느 장소에서 성장해도 동물일 뿐이다. 하지만 사람은 결정적 시기를 누구와 보내느냐에 따라 동물처럼 크기도 하고, 번듯한 사람의 모습으로 잘 자라기도 한다. 이러한 차이가 생기는 이유는 동물의 뇌와 사람의 뇌가 다르기 때문이다.
동물들의 뇌는 거의 대부분의 발달과정이 고정적으로 정해져 있다. 동물들은 태어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부터 놀랄 만큼 독립적이다. 돌고래는 태어나면서 헤엄친다. 기린은 몇 시간 만에 일어서는 법을 배운다. 새끼 얼룩말은 생후 45분 안에 달릴 수 있다. 초파리는 나는 법을 배우러 학교에 갈 필요가 없다. 초파리는 배우지 않아도 처음부터 날 줄 안다. 이렇게 보면 동물들이 커다란 장점을 가진 것 같지만 실은 그들의 한계다.
새끼 동물들이 빨리 발달하는 것은 그들의 뇌가 주로 미리 정해진 절차에 따라 회로를 형성한다는 의미는 그들에게 융통성과 확장성이 없음을 의미한다. 즉 고래나 침팬지가 아무리 어린 아이 아이큐만큼 높다고 해도 그들은 3년, 5년, 10년이 되어도 먹고 자고 생식하며 자식을 번식하는 수준 이상의 삶을 살 수 없다. 동물의 뇌는 이렇듯 거의 정해져 있기 때문에 어떤 환경에서 누구와 함께 성장하든지 간에 큰 변화 없이 개는 개로, 고양이는 고양이로 크는 것이다.
한편 인간의 뇌는 상당히 미완성된 상태로 태어나면서 세부적인 삶의 경험에 의해 변화하는 가소성을 가진다. 즉, 인간은 결정적 시기에 어떤 환경적인 자극을 받느냐에 따라서 사람답게 성장할 수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 결정적 시기에 동물에 의해서 키워진 사람은 동물의 자극에 의해서만 뇌가 변하기 때문에 동물의 정체성과 행동을 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결정적 시기를 사람인 부모에 의해서 정성껏 양육 받은 아이는 사람의 정체성을 가지게 되고, 사람의 생각과 말 그리고 행동을 할 수 있게 된다. 즉, 사람이 사람다운 정체성을 갖게 되는 것은 사람인 부모와의 관계를 경험했기 때문이다.
이때 아이가 부모와의 관계를 통해서 사람다워지는 경험의 요체는 언어경험이다. 사람을 통해서만 언어를 경험하고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독일의 철학자이자 언어학자인 훔볼트(Humbolt)는 언어는 생각하는 방식을 결정한다고 주장했고,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말했다. 이들의 말처럼 인간의 언어는 사람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에 영향을 주면서 정체성을 형성한다. 부모의 언어는 아이의 ‘정체성’ 형성에 어떻게 영향을 주는 것일까?
정체성은 영어로 identity다. 이는 동사 identify의 명사형이다. identify는 ‘지칭하다’ ‘확인하다’라는 뜻을 갖는다. 즉, 정체성은 누군가가 나를 누구라고 ‘지칭해준(identify)’ 결과다. 김춘수의 <꽃>이라는 시의 첫 구절을 보자.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 그는 다만 /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 그는 나에게로 와서 / 꽃이 되었다.’
태어날 때 아이는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양육자인 부모가 아이를 ‘누구’라고 불러주었기(identify) 때문에 아이는 자신이 누구인지(identify) 알게 된 것이다. 아이는 양육자가 자신을 누구라고 불러주고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서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는’ 존재라는 정체성을 가질 수도 있고, 아름답고 보배로운 ’꽃‘이라는 정체성을 갖을 수도 있다.
이처럼 아이는 자신에게 이름을 지어서 불러준 양육자의 언어를 통해서 자신과 세상에 대한 인식을 가지게 되는데, 이것이 아이의 정체성이고 다른 말로는 아이의 자아존중감이다. 자아존중감은 아이의 모든 생각과 감정, 경험 그리고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
아이 자존감의 바탕은 부모의 일관성 있는 언어다
부모를 통해서 경험한 언어에 일관성이 있고 긍정적인 아이는 자신과 세상에 대한 밝은 인식과 높은 자아존중감을 갖게 된다. 하지만 부모를 통해서 경험한 언어에 일관성이 부족하고 부정적인 아이는 세상에 대해 두려워하고 낮은 자아존중감을 갖게 된다.
자신을 쥐라고 믿는 성인 남성이 있었다. 그의 행동은 쥐와 흡사했다. 그는 오랫동안 정신병원에 입원했었는데, 오늘이 그가 퇴원하는 날이다. 지난 몇 주 동안 환자와 상담한 결과, 의사는 그가 더 이상 자신을 쥐라고 믿지 않는다고 진단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제 담당 의사와 간호사의 배웅을 받으며 병원 문을 막 나가려고 한다. 그런데 갑자기 그의 얼굴이 굳어지면서 그 자리에 멈추게 되었다. 이상하게 생각한 의사가 그에게 “괜챦냐?”고 하면서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그는 병원 출입문 창을 통해 멀리 보이는 고양이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는 그 고양이 때문에 병원 문을 열고 나갈 수 없다고 말했다. 의사는 말했다. “당신은 이제 더 이상 자신을 쥐라고 생각하지 않는데 왜 못 나가겠다는 겁니까?” 의사의 질문에 그가 대답했다. “저는 제가 쥐가 아닌 것을 확신하지만, 만약 저 고양이가 그 사실을 모른 채 저를 쥐로 보고 공격해 오면 어떡합니까?” 이 말을 들은 의사는 그가 아직 치료가 덜 되었음을 깨닫고 퇴원을 취소했다.
필자는 미국에서 대학원을 졸업하고 LA지역에서 5년간 상담사로 일했다. 이때 필자가 주로 맡은 일은 정신질환자와 그들의 가족을 상담하는 일이었다. 필자가 정기적으로 방문했던 한 정신요양병원에서는 앞서 ‘자신을 쥐라고 믿은 사람’ 같은 환자들이 많이 있었다. 어떤 사람은 항상 농구유니폼을 입고는 오른손으로 농구공을 돌리며 복도를 걸었고, 어떤 사람은 테이블에 앉아서 종이에 숫자를 쓰며 지나가는 다른 환자들에게 회계 업무에 관한 조언을 했다. 이들의 특징은 인간의 뇌가 가진 가소성과 역할의 융통성이 발휘되지 못하고 하나의 역할에만 고정화된 것이다.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이들이 성장기에 경험한 부모의 언어에 일관성이 부족했거나 거의 없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부모의 음성언어와 비음성언어간에 지속적으로 일관성이 부족하면 아이는 심리적 방어력을 잃는다. 예를 들어 엄마가 아이에게 말로는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표정은 어둡고 냉정하며, 목소리 톤에는 화가 난 것 같다면 아이는 혼란스럽다.
부모가 일관성 없는 언어로 훈육하는 것도 아이의 심리적 방어력과 자존감을 떨어뜨리는 요인이다. 아빠가 아이에게 평상시에, “점수는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니야. 열심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 라고 말했는데, 막상 아이가 시험에서 40점을 맞았다고 하니까 한숨을 쉬면서 “그것도 점수라고 받은 거니?”라는 식으로 말했다면 아이는 ‘멘붕’에 빠진다. 아빠의 말에 일관성이 없기 때문이다.
부모가 자녀에게 제공하는 언어에 지속적으로 일관성 없으면, 아이는 그것을 ‘안전하지 못한 환경’으로 인식해서 부모로부터 자기를 방어하기 위해 스스로 안전하게 느끼는 가상의 세계에 빠져들 수 있다. 이런 아이는 방어적이 되어서 ‘자기다운’ 말과 행동으로 표현할 수 있는 감각이 떨어지고, 자기만의 세계에 고립되어 살기 때문에 타인과 교류하면서 ‘즐거움’을 주고받는 능력인 사회성이 부족하게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자녀에게 일관성 있는 언어를 제공할 수 있을까?
첫째, 부모가 음성언어와 비음성언어가 일치된 메시지를 제공하도록 노력해보자. 입을 통해 나오는 소리가 음성언어이고, 그 소리와 함께 전달되는 몸짓이나 제스처 같은 다른 것들이 비 음성 언어인데, 이 둘이 일치해야 한다. 엄마가 아이에게, “사랑한다”라고 음성언어로 말했다면, 그에 따른 표정이나 목소리 톤, 몸동작 같은 비음성언어도 “사랑한다”는 음성언어에 상응하는 것이어야 한다. 부모의 음성언어와 비 음성언어가 일치할 때 아이는 부모가 하는 말 때문에 혼란스러움을 겪는 일이 줄어들 것이다.
둘째, 부모가 훈육에서 사용하는 언어에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 아빠가 아이에게 “점수보다는 노력하는 과정이 중요한 거야”라고 말했다면, 아이의 시험 성적이 나왔을 때 일관성 있게 말하자. 예를 들면,
아빠: 시험 결과가 나왔구나. 네가 준비한 만큼 결과가 나온 것 같니?
아이: 노력을 별로 안 했어요.
아빠: 네가 노력하는 과정이 중요해. 다음엔 열심히 해서 너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으면 좋겠구나.
아이: 네, 노력해볼게요.
이처럼 부모가 훈육하는 언어에 일관성이 있을 때, 아이는 부모를 신뢰하게 된다. 이러한 부모의 일관성은 아이가 높은 자아존중감을 발전시키는 토대가 된다.
[남동우 소장의 저서 '부모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가 아이를 바꾼다' 중에서]